영산강 지역 별미
고려 말 흑산도에 왜구 출몰 주민들 영산강 거슬러 나주로
영산포까지 배 타고 10~15일 다른 고기는 다 썩었지만
홍어는 썩지 않고 발효

홍어 40% 나주서 삭힌 것
칠레·뉴질랜드·중국산… 삭힌 홍어 썰어 놓으면
전문가도 원산지 구별 못해

원산지보다 삭히는 기술
잘 삭힌 홍어는 썰 때 칼에 들러붙어
톡 쏘는 알싸함 뒤에 감칠맛이 숨어있어

흑산도에선 생 홍어회 즐겨
"싱싱한 홍어 왜 삭혀먹나" 핑크빛의 촉촉한 생홍어
비린내·잡내 전혀 없어 고상하고 섬세한 맛

설 연휴 고향이 전라도와 경상도라면 먹게 될 음식이 있다. 전라도라면 홍어, 경상도라면 문어다. 명절 차례상이나 결혼식·장례식 등 중요한 날 상차림에서 빠지지 않는 지역의 '소울 푸드'다. 두 음식이 어떻게 두 지역의 대표 음식이 됐는지 그 사연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나주에선 홍어 없으면 '잔치한다'는 말을 못 해. 그런데 홍어 마련하는 부담이 너무 큰 거요. 그래서 나주의 한 마을 주민들이 '잔칫상에 홍어를 놓지 말기로 하자'고 합의한 거야. 얼마 후 그 마을에 결혼식이 있었어요. 타지 사람들이 왔다가 '왜 홍어가 없다냐' 난리가 난 거야. 마을 사람들이 '우리는 이제 잔치 때 홍어를 내지 않기로 했소' 하니, 타지 손님들이 '그럼 느그들끼리만 잔치 허지 왜 우릴 부르냐'고 화를 냈어. 결국 홍어 내지 말자는 합의는 없던 일이 돼 버렸지."

"호남에서 홍어가 얼마나 중요하냐"고 묻자 전남 나주 '홍어일번지' 대표이자 국내 최초·유일의 홍어 명인 안국현씨가 "20여년 전 있었던 실화"라며 해준 이야기다. 그만큼 코를 톡 쏘는 삭힌 홍어는 호남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음식이다.

어디 것이냐보다 제대로 삭혔느냐가 중요

전남 나주 ‘홍어일번지’ 안국현 대표가 숙성 중인 홍어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30~40여년 전만 해도 모든 전라도 땅에서 홍어를 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홍어가 주로 잡히는 흑산도 등 도서 지역을 제외한 뭍에서는 전남 나주·함평·영암·목포에서만 즐겼다. 이 지역들은 영산강을 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려 말 흑산도 일대 섬들은 왜구에 시달렸다. 정부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섬 주민들을 뭍으로 이주시키고 섬을 텅 비우는 정책. 흑산도 사람들은 배 타고 목포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에 살다가 왜구가 잠잠해지면 고향 흑산도로 돌아가곤 했다. 흑산도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 영산포에 닿으려면 열흘에서 보름이 걸렸다. 냉동·냉장 기술 없던 시절 다른 고기는 썩었지만 홍어는 썩지 않고 발효됐다. 이렇게 삭힌 홍어가 나오게 됐고, 나주와 인근 지역에서 별미로 즐기게 됐다.

[호남의 소울푸드 전라도 홍어]
한때 '대한민국 4대 강'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물줄기였던 영산강은 홍수와 가뭄 피해를 막으려고 건설한 하굿둑과 댐으로 얕은 개천 수준으로 전락했다. 나주 영산포도 과거 영화(榮華)를 잃었다. 하지만 홍어를 삭히는 '원천 기술'은 그대로 남았다. 안 대표는 "현재 나주에 홍어 가공·판매 업체 37곳, 홍어 전문 식당 10곳이 있다"며 "전국 유통되는 홍어의 40%가 나주에서 삭힌 것"이라 했다.

호남에서도 영산강 일대에서만 먹던 홍어가 전국적 인기를 얻으면서 귀한 몸이 됐다. 안 대표는 "국내산 홍어는 5%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칠레산은 알지만 아르헨티나·뉴질랜드·포클랜드·미국·우루과이·중국·일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오는 건 잘 모르지요."

삭힌 홍어는 썰어 놓으면 전문가도 구분하기 힘들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어디 것이냐보다 얼마나 제대로 삭히느냐가 중요하다. "잘 삭은 홍어는 썰면 칼날에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아요. 특히 제대로 삭힌 국산 홍어는 입에서 '당기는 맛'이 있어요. 톡 쏘는 알싸함 뒤에 숨은 감칠맛이 계속 먹고 싶게 만든달까. 잘 못 삭히면 맵고 톡 쏘기만 해요. 비리고 느끼하지."

삭혀야 제맛? 홍어를 왜 삭혀

광주 ‘김가원’ 홍어삼합. 세 음식이 만나면 형언할 수 없이 복합적인 맛과 향의 융합이 벌어진다. 여기에 막걸리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환상이다.
홍어는 삭혀 먹는 생선으로 알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는 홍어를 삭히지 않고 싱싱할 때 먹었다. 흑산도에서도 홍어를 삭히지 않고 회로 먹는다. "삭힌 홍어는 저장 기술이 없던 시절 먹던 거예요. 지금은 새벽에 경매받은 홍어를 그날 오후 받을 수 있는데 뭣 하러 삭혀 먹어요?" 광주광역시 '김가원' 김문희 대표는 자녀 교육을 위해 지금은 뭍으로 나왔지만 예전엔 홍도에서 해녀로 일했고, 남편은 홍어잡이 배 선주였다. 김씨가 둥그런 접시에 그날 흑산도에서 들어온 홍어와 30일 숙성시킨 홍어를 반씩 담아 냈다.

삭힌 홍어와 생 홍어는 눈으로 보기에도 차이가 났다. 삭힌 홍어가 살짝 건조한 듯하면서 불그스름한 주황빛이 감돈다면, 싱싱한 홍어는 촉촉하면서 뿌연 흰색에 전체적으로 핑크빛이 돌았다. 맛은 더 확연하게 달랐다. 생 홍어회에서는 생선 비린내 또는 잡내가 전혀 없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차졌다. 콩고물 버무리지 않은 인절미랄까. 고상하고 섬세한 맛이다. 삭힌 홍어회를 입에 넣자 그제야 '홍어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어회라고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사르르 녹는 홍어 애… 마니아라면 삭힌 홍어 튀김에 감동할 듯

▨나주 '홍어일번지': 여러 홍어 요리를 코스로 낸다. 홍어 애(간)와 껍데기가 애피타이저로 나오고 이어 홍어삼합, 삭히지 않은 홍어 튀김, 삭힌 홍어 튀김, 3년 숙성 홍어김치, 홍어무침, 홍어전, 홍어찜 등이 차례차례 나온다. 꽁꽁 얼린 홍어 애는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게 고소한 아이스크림 같다. 홍어 마니아라면 삭힌 홍어 튀김에 감동할 듯하다. 튀김옷을 깨물면 홍어 삭힌 냄새가 폭탄처럼 터져 나온다. 홍어 젓갈과 보리애국이 밥과 함께 식사로 나온다. 정식 2인 5만(칠레산)·7만원(국내산), 3인 6만·9만원, 4인 8만·12만원, 삼합 2만5000원·5만원. 택배 주문도 가능하다. 국내산 홍어 기준 2호(약 6인분) 7만5000원, 3호(약 10인분) 10만5000원, 5호(약 20인분) 20만5000원. (061)332-7444, www.nskates.com

▨광주광역시 '김가원': 삭히지 않은 생 홍어를 30일쯤 삭힌 홍어와 함께 낸다. 흑산도에서 잡힌 '1번선'만 사용한다. 1번선이란 크기도 크기지만 품질이 그날 경매 들어온 홍어 중 최고를 뜻하는, 경매인들끼리 쓰는 은어. 홍어삼합 8만·10만·12만원, 홍어찜 10만원. (062)382-8700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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