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파 시민단체 실무자 출신의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문재인 정권과 나 홀로 奮戰
⊙ “‘가진 자의 나팔수’라는 비난에 속상하지 않아…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았기에 떳떳해”
⊙ “시민단체 간사 시절, 대책 없던 낙관주의자. ‘잘될 거다’는 믿음으로 밀고 나갔죠”
⊙ “우파들은 ‘남이 내 것을 빼앗아 못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
⊙ “세대교체로 정치 ‘메신저’ 바꿔야 하고 ‘메시지’도 재벌 옹호, 수구·냉전적 사고 버려야”

全希卿
197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행정학과 졸업.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정책팀장,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역임. 새누리당 원내 부대표, 자유한국당 대변인 역임. 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사진=조현호
  보수 위기의 전사(戰士), 보수의 잔 다르크로 불리는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44·全希卿·비례대표)을 지난 8월 9일 국회에서 만났다. 화사한 흰색 정장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탄력 있는 짧은 웨이브 머릿결에서 전사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국회 의원회관 629호에 들어서자 한쪽 벽에 송복(宋復)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2014년 12월 겨울 宋復’
 
  전 의원은 우파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2006.8~2012.4)을 지냈고 송복 교수는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대개 장관·법조·교수 이력이 즐비한데 좌파운동권 출신도 아닌 우파단체, 그것도 실무자가 국회에 입성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이란 직함도 가졌었다.) 하지만 당당히 비례대표 9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전희경 의원실에 걸려 있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적힌 액자.
  TV 퀴즈 프로그램 중에 〈1대 100〉이라는 프로가 있다. 혹자는 “전 의원이 1대 130으로 싸운다”고 말한다. ‘130’은 민주당 의석수다. 원래 119석이었으나 6·13 재보궐 선거를 거치며 늘었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었던 지방선거 표심(票心), 친박·진박·비박이 뒤엉킨 당내 분란 속에서 전 의원은 그야말로 문재인 정권과 나 홀로 분전(奮戰)하고 있다.
 
  국회에 입성한 지 2년여가 지났다. 그 사이 오만 가지 일이 벌어졌다. 멀쩡한 대통령을 탄핵까지 시켰으니 극한(極限)의 정치 경험이었으리라. 그가 겪은 무시무시한 현실정치 체험기가 궁금했다.
 
  어쩌면 모진 상처로 가득할지 모르는 여전사의 내면이 궁금했다. 여러 번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설득했고 다행히 성사됐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인 전희경 의원.
  전 의원에게 건네받은 명함에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부연 설명을 해주세요.
 
  “영어로 ‘프리덤 이즈 낫 프리’(Freedom is not free)인데 미국 워싱턴D.C.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적힌 말이죠. 우리 현실에서 이 표현만큼 절실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경제학 경구 중에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송복 선생님이 저 말을 써주시면서 ‘자유는 공자가 아니다’가 아니라 ‘공짜가 아니다’고 강조하셨죠.”
 
  그러더니 그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생각을 펼쳤다.
 
  “자유냐 평등이냐는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요즘 들어 평등을 향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근본적 힘은 자유에 있어요. 식민지 백성에서 근대 공화국의 국민이 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우리 각자가 자유인이 됐다는 겁니다. 소유와 재산권을 인정받고 개인의 삶을, 그 여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자유는 광복과 해방,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가고자 하던 정서, 물론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적 측면도 있었지만, 그런 정서가 강했었죠. 우리는 알 수 없었어요. 당시 세계사 조류가 자유 혹은 자유민주주의에 편승한 세력과 국가만이 발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또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르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인식도 미비했고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는 갈등과 혼란을 보면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말만큼 절실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시작부터 너무 진지해지는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그는 요즘 세대가 쓰는 용어인 ‘진지충’(진지한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 고향은 어디시죠.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다 어려서 의정부로 이사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어요.”
 
  ― 고교 시절, 전희경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합니다. 전사 이미지와….
 
  “정해진 학업과 과업을 짊어져야 했던 고교 시절보다 초등학교 시절이 지금의 저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하루 두세 시간 동안 텅 빈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하늘을 보다가, 땅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생각이 많은 아이였어요.”
 
  ― 네? 초등학교 때요?
 
  “꼬마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런 것들이죠. 우리 집은 왜 의정부로 이사를 왔나, 아버지 사업 실패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린 눈에 비친 단상들, 예컨대 무와 배추를 사라고 외치는 아주머니, 뒤에서 리어카를 미는 왜소한 체격의 아저씨, 다닥다닥 집들이 붙은 허름한 골목, 의정부에서도 참 낙후된 동네에서 문만 열면 마주치던 얼굴들을 떠올렸어요.”
 
  전 의원은 1남 2녀의 맏딸로 태어났다. 서울 3층짜리 양옥에서 일하는 사람을 둘이나 두고 살 정도로 잘살았다. 젊은 아빠의 사업 실패로 졸지에 벼락을 맞은 그의 집은 아무 연고도 없던 의정부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는 “(서울 살림의 미련을 못 버린)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이 낯선 집의 낡은 문지방을 넘어서면서부터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요즘의 다가구처럼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살다 보니 함께 놀 친구들이 넘쳐났다.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간 집, 할머니가 타지에서 일하는 부모를 대신해 손주들을 키우는 집, 젊은 신혼부부 집, 미군부대 다니는 아저씨네 집, 공장 다니는 언니네 집까지 여러 사연이 방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죠.
 
  시끌벅적 말소리가 들리고, 음식 냄새가 맛있게 합쳐지던 김씨네가 제 어린 시절 기억의 시작이에요. 동네 아이들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누군가의 집을 아냐고 물으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빚을 지고 도망쳐 온 사람들이 많아 그렇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죠. 보잘것없이 가난하고 초라한 동네, 요즘 표현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거처가 그곳이었습니다.”
 
 
  행상 할머니에게 가지, 오이를 사던 조숙한 소녀
 
  ― 엄청 조숙했네요.
 
  “조숙했다면 조숙했죠. 선생님들이 제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쟤가 학교 스탠드에 앉아 무슨 생각을 저리도 할까’라고.”
 
  ― 또래들과 생각과 말이 달랐겠네요.
 
  “근데 친구들과 있을 때는 그냥 유쾌했어요. 친구나 선생님 말투를 잘 흉내 냈고 1시간짜리 책이나 드라마를 보면 마치 3시간 본 것처럼 설명할 수 있었어요.”
 
  ― 수다도 잘 떨고?
 
  “내용 있는 말을 많이 했다~, 하하하.”
 
  ― 국회의원이 된 지금의 모습을 보고 친구나 선생님 중에 ‘그렇게 될 줄 알았어!’라고 하는 이가 있었나요.
 
  “대학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얘기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얼마 전 거의 30년 만에 학창 시절 은사님들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저를 조용하고 수줍은 학생으로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 ‘저요! 저요!’를 못하는….
 
  “좀, 그런 성격이에요. 긴장도 많이 하고….
 
  당시 우리 집 상황이 ‘저요, 저요’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못 됐어요. 그래도 부모님과 대화는 진짜 많이 했어요. 날밤을 새우면서….
 
  엄마는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저한테 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 외면하고 싶고… 그럴 나이잖아요. 의논을 빙자한 고통 분담을 요구하셨다고 할까. 또래보다 의젓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랐는데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절 어린이로 대하지 않았어요. ‘네 생각은 어떠니?’ 하시며 말이죠.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따르거든요. 그런 것들이 아쉽기도 하고, 또 결과적으로 좋았기도 한 측면도 있었고….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 밖에서 목청을 가다듬곤 했어요. 높은 옥타브로 ‘다녀왔습니다’를 외쳤어요. 부모님이 들으실 때 걱정 없는 목소리로. 실은 초등학생도 고민이 많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교우관계에서 오는 고민도 있고, 괜히 우울할 때도 있고 그렇잖아요. 아무리 애들이라도….”
 
  전 의원은 “어렸을 때 얼마나 눈물이 많았던지, 행상 할머니만 보면 우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 어허….
 
  “행상 할머니들이 나물 같은 것을 놓고 쪼그려 앉아 담벼락 그늘을 좇는 모습이 그렇게 가슴 아팠어요. 또 그 나물들… 안 팔린 나물이 오후가 되면 숨이 죽어 축 늘어져 있었죠.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울곤 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왜 우냐’고 혼이 나곤 했어요. ‘네가 울어서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나’ ‘값싼 눈물 흘리지 마라’고도 하셨어요.
 
  그런 얘기를 무던히 듣고 컸는데 그 무렵부터 제가 한 일은 시장통에서 가지 한 무더기, 오이 한 무더기를 사오는 것이었어요.”
 
 
  의정부 금오동에 살던 이웃들
 
지난 3월 28일 ‘학부모100 콘서트’에서 전희경 의원이 학부모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전 의원님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사람들이 저더러, 제 말을 두고 ‘기득권의 논리다’ ‘피도 눈물도 없다’ ‘네가 많이 가져서 그런다’, 심지어 ‘많이 가진 자의 나팔수’라고 얘기하지만….”
 
  ― 그 말 들으면 정말 속이 상하시겠네요.
 
  “아뇨. 속상하지 않아요. 왜냐면 스스로에게 떳떳하기에, 어려서부터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았고, 그분들을 보면서 나약한 눈물을 흘려봤기에, 그분들 누구도 누군가의 값싼 눈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지켜봤기에 그래요.”
 
  전 의원은 “당시 저나 그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회적 약자였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내 자식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할 것이라는 결의가 가슴에 불을 지폈었다”고 했다. 또 “그분들은 남 탓하고 사회 탓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오늘만큼의 최선을, 내일은 그보다 조금 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고 했다.
 
  ― 의정부 금오동 이웃들은 이후 어떻게 됐나요.
 
  “6년여 시간을 거치는 동안 우리 집은 문간방을 면했고, 이후 자그마한 옆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 지역에서 형편이 좀 나은 동네로 이사를 했고, 이즈음 우리처럼 동네를 떠난 이들도 많았어요. 다들 ‘지금보다야 못하랴’라는 오기로 떠났죠.”
 
  그 오기는 결국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전 의원에 따르면,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나중 어엿한 집주인이 됐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게 한”이라던 아저씨는 아들이 국내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을 거쳐 자기 회사를 차리자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아저씨네는 음식점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못살던 그 시절에도 기품이 있었던 그 댁 아주머니는 말 그대로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됐다.
 
  “그분들은 자녀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요. 지금 의정부에 사시는 분들 중에 국회의원이 된 저를 보고 힘껏 박수 치는 분들이 계시다고 부모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 어릴 때 꿈이 뭔가요.
 
  “딱히 ‘이거다!’ 하는 꿈은 없었던 것 같아요.”
 
  ― 보통 학기 초 생활기록부에 장래희망란이 있었잖아요.
 
  “맞아요. 그럴 때면 변호사라고 쓰고….”
 
  ― 그래서 이화여대 행정학과(95학번)에 입학한 거군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그 과에 가면 여러 가능성이… 고시 공부도 할 수 있고, 기업체에 갈 수도 있고, 그저 무난한 과라서 진학했어요.”
 
 
  “오늘의 최선이 내일의 내 모습이라 생각했어요”
 
  ― 고시 공부는 해봤나요.
 
  “학부생일 때는 안 하고, 졸업 후 2년간 신림동 고시촌에서 육법전서(六法全書)를 본다고 봤는데 실패했죠. 그런데 실패의 기간이 저한테는, 소위 말하는 리걸 마인드(Legal Mind)라고 할까. 법이 뭔지, 법이 담고 있는 법 정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 중에 고시에 합격한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공부를 괴롭게 해야 합격하는데, 고시촌에서 제일 해맑게 육법전서를 공부하던 이가 전희경’이라고요.”
 
  ― ‘해맑은’ 육법 소녀?
 
  “네. 헌법재판소 판례 같은 것을 소설책 읽듯이 읽었으니, 합격이 만무하죠. 하하하. 딱 2년만 하고 접은 거죠.”
 
  ― 아쉽지 않았나요? 학창 시절, 매우 착실한 모범생으로 보여요.
 
  “아쉽지 않았어요. 저는 반복적이거나 규칙적인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 좋아했던 책이 《톰소여의 모험》이나 《해저 2만리》 〈은하철도 999〉에 환호했어요.”
 
  전희경 의원은 대학을 졸업한 뒤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 한국경제연구원 정책팀장,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을 지냈다.
 
  ― 첫 직장 생활은 어디죠.
 
  “바른사회시민회의죠. 간사로 있었어요.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11년이 걸렸네요. 바른사회시민회의는 모교 지도교수가 창립 과정에서 애정을 기울이고 관여를 하셔서 제가 진즉부터 알고 있었고 제 사회적 관심도 그런 쪽과 맞더라고요. 제 인생의 방향을 얘기할 때 노무현 정부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데 당시 노무현 정부와 정책, 그 사람들, 그들의 역사인식, 대미·대북관… 이런 것들이 저랑 정말 이질적이었고, ‘이렇게 가면 안 된다’는 것의 집대성같이 보였어요.”
 
  ― 보통 대학원을 졸업하고, 빨리 돈 벌어 부모님 속옷 사드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척박한 시민단체 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그러니까 참… 어찌 보면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죠. 자신에 대해 ‘잘될 거다’고 생각하며 밀고 나갔죠.”
 
  ― 그 무렵, 정치라든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아뇨,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보통 사람은 그렇잖아요. 단계별로 자기 인생의 과업을 성취해 가면서 인생을 꾸려가잖아요. 저는 달랐습니다. 오늘의 최선이 내일의 내 모습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하고, 남보다 잘하는 게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는 자산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청년정치, 청년정치…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청년 정치인의 진입만이 아니라 그 긴 인생에서 청년 정치인들이 정치를 삶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꾸려 가느냐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국회의원 전희경’의 미래는?
 
  “제가 (국회에 들어와) 쌓은 경험을 사장시키지 않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텐데, 지금은 비례대표 직분에 충실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요.
 
  “하하하.”
 
 
  정부나 국가의 오만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지난 2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2018-체제전쟁 제2화 자유를 찾습니다.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토론회에서 전희경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우파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나요.
 
  “‘우파적’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그리고 어찌 됐든 나는 남보다 조금은 잘살고 싶다, 내 자식도 나보다 조금 더 낫게 남보다 낫게 되고 또 그렇게 키우고 싶다’ 거든요.
 
  우파들은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못사는 것은 남이 내 것을 빼앗아 못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모두 다 똑같이 살아야겠다는 것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깨닫고 계신 분들이죠. 삶의 출발이 인간이 지닌 능력, 저마다의 소질이 다른 것처럼 각자의 모양이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좌파들은 자기네 자녀들은 그렇게나 자사고, 특목고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겐 서열화를 싫어한다며 자사고, 특목고를 없애려 안달입니다. 그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데도 말이죠. 여러 다양한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양성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나약하게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저마다의 인생은 가치와 종착지가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이자 순리라고 생각해요. 우파의 가치이기 때문에, 우파의 가치가 이런 것이라고 알았기에 우파의 길을 걸었던 게 아니라 세상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다 보니 굉장히 오른쪽으로 가 있더라는 것이죠.”
 
  전 의원은 한 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렇게 강조했다. 말 속에 결기 같은 게 느껴졌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런 거예요. 정부나 국가의 오만, 그들이 갖는 삶의 태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결국엔 실패할 것이라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정부와 국가가 아무 일도 안 하면 좋은 거냐?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고 했을 때 자유를 자유 그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자유방임, 혹은 약육강식의 세상에 그냥 내버려 두거나 방치하는 것을 자유라고 매도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번 최저임금 논란만 하더라도 그래요. 보세요! 최저임금… 얼마나 숭고한 가치예요. 사회적 약자를 돕겠다며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자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요.
 
  최저임금이라도 받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날아가 버리고 그야말로 영세 자영업자, 영세 소상공인들이 어렵게 꾸리던 가게, 공장들이 문을 닫는 결과가 단박에, 불과 1년도 안 돼 나타났잖아요.
 
  최저임금을 그런 식으로 다뤄선 안 된다는 것은 《경제학원론》만 읽어도 다 아는 얘기예요.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에서, 일부 언론에서 그렇게 매도할 수 있는지…, 북한에 대해 찬양 일색인 자신들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줌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이고 서민들이죠. 그런 분들에게 우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옳은 얘기도 일단 사람들이 들어보고 싶게 만들려면 흥미와 재미가 있어야 해요. 너무 진지하고 심오한… 그런 얘기보다 생활의제로 다가가 일일이 설명해 주는 게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우파 내에서 세대교체… (우파의 논리를) 담는 틀을 새롭게 바꿔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와 전희경
 
  이 대목에서 기자는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1925~2013)에 대한 전희경 의원의 생각을 소개할까 한다.
 
  마거릿 대처 하면 철의 여인, 대처리즘, 영국병에서 영국을 구한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 의원은 “1982년 무렵 처음 본 그녀의 모습은 신념에 찬 사람의 전형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전 의원이 대처에 대해 쓴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글을 읽었다. 1979년 대처에게 영국의 운명이 맡겨졌을 때 영국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주택, 통신, 석유 등 돈이 되는 거의 모든 산업이 국유화돼 있었다. 막대한 적자를 세금으로 메우는 일이 되풀이되고 강성노조는 연일 파업으로 정부와 국민을 협박했다. 사람들은 일해서 먹고살기보다 정부의 실업수당을 받는 길을 택했다. 복지는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무오류의 절대 진리로 받들었다.
 
  다음은 전 의원의 〈사회 같은 것은 없다〉의 일부다.
 
  〈…대처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이미 영국병은 약이 아닌 수술로만 고칠 수 있는 상태였고 대처는 길을 알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대처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힘을 믿었다.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늘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이 있었다고 할 만큼 그녀는 시장이야말로 난국을 해결할 유일한 처방이라 확신했다.
 
  또 국민을 설득했다. 대처는 재정적자를 야기하는 공기업을 민영화시켰다. 주식을 매각하여 영국인들이 스스로 주주가 되어 기업의 수익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나라야 어찌 되든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려는 강성노조의 횡포에는 법치로 맞섰다.…〉(p139~140, 《내 마음 속 자유주의 한구절》, 2015)
 
  전 의원의 말이다.
 
  “무엇보다 대처는 영국인들의 인식을 바꿔놓았습니다. 대처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설파했어요. 대처에게 ‘사회’라는 말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인생을 정부에 기대려는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들의 도피처였습니다.
 
  대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도덕적이고 가치 있는 일임을 일깨웠죠. 스스로를 위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결국 나라도 부강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했어요.”
 
  전 의원은 “우리에게도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결국 세금으로 충당하는 ‘사회적 기업’ ‘사회적 투자’ ‘사회적 일자리’가 범람하는 대한민국에 ‘이대로 가다간 60년 압축성장이 수년 내 압축추락으로 갈 수 있다’고 일침을 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처의 위대함은 ‘정직’에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불평등한 사회와 가난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 중에서 어디에 살고 싶은지 선택하라고 하면 답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국가의 정책 목표를 아주 상투적으로 양극화 해소, 격차 해소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빈곤 해소라는 말은 맞아요. 가난한 이들을 (가난에서) 탈출시키는 일은 국가정책이 가져야 하는 목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격차의 문제나 불평등의 문제들을 정부가 해소해야 한다는 게 정책 목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살고, 빈곤한 사람이 빈곤에서 탈출하되, 갭(차이)이 더 벌어진다고 해서 실패한 정책이냐는 겁니다. 언젠가 대처 수상이 손가락으로 갭을 그리면서 설명하는 걸 인상적으로 본 적이 있어요. ‘당신들은 이렇게 가자는 거냐’면서.
 
  사람들이 경제논리를 정치화시키는 프레임에 빠져 있어요. 잘나가는 사람 뒷다리 잡고, 너는 여기까지만… 이라는 것들을 정부가 무자비하게 강요할 수 있어요. 그러면 피해는 사회적으로 제일 약자에게 돌아갑니다.”
 
 
  새로운 보수 정치의 시작은…
 
작년 7월 11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전희경 의원이 홍준표 당시 대표에게 대변인 임명장을 받았다.
  ― 보수에 대한 자기반성도 듣고 싶어요. 보수를 비난하는 사람은 ‘호랑이가 복제되는 시대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산업화 기억에만 사로잡혀 유연성과 부드러움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보수라는 게, 어찌 보면 보수 정치다운 보수를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봐요. 산업화 시절을 권위주의 시대라 부르고, 군부독재를 보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렀던 거죠. 게다가 안보관과 지역기반 등으로 보수를 규합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이념과 가치를 정립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소홀했던 것이죠. ‘당연히 옳은 것인데 뭐가 설명이 또 필요해’라는 식이었어요.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중도실용을 표방하며 ‘이념시대는 갔다’고 선언했어요. 사람의 인식 틀을 결정짓는 것이 이념인데 사실상 이념 포기를 선언한 것이죠. 박근혜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던 것처럼 (이념의 중요성을) 인식은 했지만 뭔가 집요하고 체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어요.”
 
  ― 우리 국민이 보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국민에게) 오해받고 있는 측면이 명백히 있다고 생각해요. 보수의 가치에 대해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죠. 그럼 오해를 풀어야 되잖아요. 오해를 풀려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게 보수가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저는 엄밀한 의미의 보수 정치… 가치 중심의 보수 정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죠.”
 
  ― 좀 더 쉬운 말로 보수 정치를 어떻게 시작할것인지 설명해 주세요.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세대교체로 ‘메신저’를 바꿔야 하고 ‘메시지’도 기득권 옹호, 재벌 옹호, 수구·냉전적 사고가 아니라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보편타당한 가치라는 점을 드러내야 합니다. 또 세금을 줄여줘야 되고, 좋은 학교를 만들어 내 자식이 꿈을 가질 수 있게 기회를 열어줘야 해요.”
 
 
  “정치인은 고통스럽다고 절규할 수도 없고…”
 

  ― 세계적으로 보수는 자본주의 세력, 진보는 사회주의 세력을 의미하는데, 한국은 진보, 혁신이라는 애매한 별호(別號)를 써서 국민이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아요.
 
  “보수는 자유를 중시하고 진보는 평등을 중시하죠. 보수는 시장경제를, 진보는 사회주의·계획경제 쪽에 시선을 두고 있죠. 보수는 선택적 복지, 진보는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고 보수는 작은 정부를 주창한다면 진보는 국가 역할을 강조하면서 큰 정부를 주장하죠.
 
  보수는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지만 진보는 기업가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봐요. 그런데 이런 식의 나뉨은 학문적 접근에 의한 것이고요, 문재인 정부에 투표한 많은 국민은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 정부가 말하는 정책을 사회주의와 등치(等値)시키면 화들짝 놀랍니다. ‘내가 무슨 사회주의자냐.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는 시민인데…’라고 말이죠.”
 
  ― 그런데 국민이 보기에 진보·복지·분배·평등이란 메시지가 먹히는 측면도 있어요.
 
  “국민을 불안과 패배감에 젖게 만들면 만들수록 국민이 자신의 삶, 자신의 일터, 우리 가정에 대해 ‘잘 안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불확실성을 높이고 불안하게 하면 할수록 국가가 제공하는 분배나 복지 같은 것들이 가급적 늘어나는 게 당장은 내가 대상이 안 될지라도 좋은 게 아니냐는 쪽으로 흐르게 돼 있어요.
 
  그러나 한번 빗장이 풀리면 다잡기가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굉장히 고통스럽게 보고 있는 것이죠.”
 
  ― 많이 고통스럽습니까.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하하하
 
  듣기 싫다, 뉴스 보기 싫다, 신문 보기 싫다, TV 보기 싫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식이 우리 때보다 잘살 것 같지 않다’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아요. 그래서 고통스러워요.
 
  그 ‘고통’을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팩트’로 보고 있어요. 국회라는 곳이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아닙니까. 드러난 표면보다 그 이면이 더 큰 덩어리의 문제들이 보이는 자리죠, 이 자리가….
 
  그러니까 더 고통스러운 것이죠. 정치인은 고통스럽다고 절규할 수도 없고… 뭐라도 바꾸어야 하니까….
 
  정치인은 어떤 경우도 국민 탓을 해선 안 됩니다. 왜 문제인지 설명하고 설득하고 국민과 함께 해결하는 것, 일하라고 정치인을 뽑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저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정치인에게나 이 시대를 ‘문제 많은 시대’로 보는 국민에게나 가장 큰 죄가 되는 시절입니다. 남은 2년 동안 처음과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만큼의 최선을,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최선을 얹는 것이죠. 정치인도 결국 직업적 충실성이 뒷받침돼야 하니까요. 매일매일 직장에서 애쓰는 이웃들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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