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리호수에 바람이 멈추면 수면 위로 또 하나의 피츠로이가 등장한다.


‘아르헨티나’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축구, 정열의 탱고 등 떠오르는 단어가 많지만 나에게 1순위는 세계 5대 미봉 중 하나인 피츠로이Fitz Roy다.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Patagonia지방의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작은 마을 엘찰텐El Chalten에는 피츠로이로 통하는 문이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명으로도 유명한 피츠로이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의 등반가와 하이커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나는 유럽 알프스를 거쳐 남미에 발을 들인 후 가장 먼저 피츠로이를 찾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홍주은·김용현씨는 신혼여행으로 세계일주 중인 부부로 “백패킹 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해서 동행했다.
초보 백패커 부부와 함께 엘찰텐에 도착하자 마을 입구에는 파란 하늘을 닮은 하늘색 아르헨티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마을 저편의 피츠로이는 구름에 둘러싸인 채 눈 덮인 아래 부분만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산’이라는 뜻의 세로찰텐Cerro Chalten이라는 별칭을 지닌 피츠로이는 구름에 갇혀 있을 때가 많아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행운이 따라주길 바라며 배낭을 멘 앞선 하이커들을 따라 한적한 길을 걸어갔다.
생각보다 한산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줄지은 레스토랑이 나타나고 이윽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을 중심에 들어설수록 사람들로 넘쳐났고, 호스텔과 장비점들은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주은씨는 내 텐트에서 함께 자기로 하고, 용현씨가 쓸 1인용 텐트와 매트를 대여했다. 

피츠로이는 로스 글라시아레스Los Glaciares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남미의 여느 국립공원들과 달리 입장료가 없었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문을 지나 가파른 숲길을 벗어나자, 탁 트인 전망대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나타나 쉼터 역할을 했다.


트레일을 걷는 내내 피츠로이를 볼 수 있어 지루할 새가 없다.





마드레호숫가에 강풍을 견디며 살아남은 나무 한 그루.




이윽고 카프리호수Laguna Capri와 피츠로이전망대 갈림길이 나타났다.
호수에 비친 피츠로이의 반영사진을 담을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한 카프리호수로 결정했다.
카프리호수 옆 캠프사이트에 도착했을 때, 피츠로이가 반 정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옆 사이트의 하이커는 이틀 연속 구름이었는데, 마침내 걷히기 시작했다고 알려 주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호수에 비친 피츠로이는 볼 수 없었지만, 배낭을 내려놓고 텐트를 쳤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다면 일정상 내일 30㎞ 거리를 가야 했지만, 카프리호수가 너무 맘에 들었다.
사이트를 구축하고 초보 백패커들을 위한 점심식사로 수제비를 준비했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끓는 물에 반죽을 떼어 넣으며 아직 반도 안 온 트레킹에 대한 무용담을 쏟아내며 깔깔댔다. 

언제나 멋진 곳을 트레킹하면 즐겁긴 하지만, 깊은 밤 텐트 안에 앉아 있으면 몸서리 칠 만큼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외로움이 동시에 찾아오곤 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자연을 함께 곱씹을 누군가가 있다는 게 행복했다.
해는 아직 중천이었고, 넉넉한 시간을 이용해 카프리호숫가를 산책했다.
피츠로이는 또다시 모습을 감췄고 거센 바람과 함께 빗방울까지 몰아쳤다.
서둘러 텐트로 돌아와 낮잠을 자는 주은씨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제발 하늘이 열리길 바라며.





광활한 습지의 나무길 위에서 반대편의 하이커와 마주치면 서로 부둥켜안듯이 반갑게 인사하며 건너게 된다.






피츠로이를 배경으로 세로토레로 이어진 트레일을 걷고 있는 트레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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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을 감은 줄 알았는데, 해가 기울고 있었다.
먹구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포인세노트Poincenot와 메르모스Mermoz를 거느린 장엄한 피츠로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카프리호수에서 튀어 오른 상어처럼 하늘을 물어뜯듯이 우뚝 서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을 만끽하며 피츠로이 꼭대기 위로 달이 뜰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침이 되자 출발 준비를 하는 하이커들로 부산스러웠다.
텐트를 접고 하이커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초록 숲과 둥근 민둥산 너머로 뾰족하게 솟은 피츠로이는 신비한 미지의 세계 같았다. 





로스 토레스호수는 정수 없이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며 미네랄이 풍부하다.




만물을 호령하듯 당당한 피츠로이

간간이 나타나는 습지와 강을 제외하면 지리산 세석평전을 걷는 듯 편안하고 여유로운 길이었다.
평지의 끝에 포인세노트 캠핑장이 있었다. 주은씨 부부는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를 들러 하산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홀로 텐트를 쳤다.
텐트와 무거운 짐을 두고 로스 토레스Los Tores호수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호수가 가까워질수록 바위 너덜길 위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 늘어났다.
남반구라 12월의 여름 날씨는 땀방울을 쏟아내게 만들었지만, 거센 바람의 땅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내 바람에 흩어졌다. 

마침내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웅장한 피츠로이와 빙하, 에메랄드빛 로스 토레스호수가 한꺼번에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숨 고를 새도 없이 호수로 뛰어 내려가 물을 한움큼 떠 마셨다.
미네랄이 풍부하다는 로스 토레스호수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정수하지 않고 마셔도 걱정이 없는 물이었다.
주은씨 부부가 늦게 도착했고, 초보 백패커들은 첫 번째 미션 성공의 기쁨을 인증샷을 찍으며 만끽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서둘러 세로토레로 향했다.
마드레(엄마)호수Laguna Madre와 이하(딸)호수Laguna Hija를 따라 걷는 길은 완만해 수월했다. 피츠로이는 배웅이라도 하듯 계속 뒤따라왔고, 모습을 감출 때 즈음 고사목 숲이 나타났다.
고르게 정리되어 있는 고사목 평원을 따라 걸으니 아고스티니Agostini 캠핑장에 닿았다. 





엘찬텐 마을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에 올라서면 구름 속으로 흘러가는 듯한 라스 부엘타스Las Vueltas강을 보며 땀을 식힐 수 있다.





엘찰텐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피츠로이가 트레커들에게 환영인사를 건넨다.





주은씨 부부는 장거리 이동에 피곤했는지 여기서 1박을 하겠다고 했다.
“용현씨 혼자 들어갈 수 있는 1인용 텐트에서 같이 자겠다고?”하고 되물었다.
게다가 버너도 코펠도 없어 걱정이 됐지만, 되돌아가는 길도 하산길 만큼이나 멀었다. 

한사코 괜찮다는 부부에게 작별을 고했다.
내일 하산 후 만나기로 하고, 나는 세로토레를 보러 올라갔다.
멀리 호수 맞은편으로 빙하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 중 하나라는 세로토레 삼봉이 날카롭게 서있었다.
토레호수Lago Torre에는 한여름 시원하게 마시기 좋은 물냉면 살얼음처럼 유빙이 가득했지만, 흐린 날씨에 찬바람까지 불어대니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포인세노트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대부분 엘찰텐에서 묵으며 당일치기로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를 각각 다녀오거나, 두 산을 한꺼번에 보고 하산하기에 오후가 되면 이 길을 지나는 이가 드물었다.
덕분에 올 때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캠핑장에 가까워지자 구름이 걷히며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동행이 되어주었다.
캠핑장은 밤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했고,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토레호수에는 일 년 내내 빙하에서 떨어져나온 얼음 조각들이 떠있어 세로토레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주은씨 부부와 함께할 수 있어 외롭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햇살에 붉게 불타오르는 피츠로이를 보기 위해 포인세노트 캠핑장에서 묵었던 것인데, 늦잠을 자고 말았다.
전날 하루 장거리 운행한 것이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이럴 것이었으면 여유롭게 아고스티니에서 묵을 것이 나을 뻔했다.
하루 더 머물까 하다 주은씨 부부가 걱정되어 하산하기로 했다. 

피츠로이는 여전히 구름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하늘은 눈이 부실 만큼 쾌청했다.
이번에는 갈림길에서 전망대 쪽으로 향했다. 오르막을 올라서자 파타고니아의 만물을 호령하듯 당당하게 자리 잡은 피츠로이의 멋진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땀을 식힐 겸 한참을 머무르다 마을로 내려갔다.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쳐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덕분에 다른 하이커들과 섞여 피곤에 지친 몸을 맥주 한잔으로 달랠 수 있었다. 

호스텔에서 재회한 주은씨 부부의 이야기는 진짜 무용담이 되어 있었다.
1인용 텐트에서 어떻게 둘이 잘 수 있었는지 설명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아고스티니 캠핑장의 명물이 되었을 것이다.
초록색 군만두를 세워놓은 듯 볼록 튀어나온 1인용 텐트 사진을 남겨놓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초보 백패커 부부는 피츠로이라는 멋진 곳에서 성공적인 첫 백패킹의 추억을 남길 수 있었고,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외롭지 않고 즐거운 트레킹의 추억을 만들었다. 










트레킹 정보


트레킹 시즌

남반구라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11월부터 2월이 최적기다.
4월 하순부터 단풍이 물들고, 5월부터 10월은 눈으로 덮인다. 
한여름에도 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하며,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므로 방한 준비에 신경 써야 한다. 

교통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비행기로 엘칼라파테로 이동 후, 다시 버스로 엘찰텐 마을로 이동한다. 


트레킹 방법
엘찰텐 마을에서 숙박하는 경우 : 이틀 동안 당일치기로 피츠로이(21㎞, 9시간)와 세로토레(24㎞, 8시간)를 트레킹할 수 있다.
걸음이 빠른 하이커의 경우 당일치기로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를 한 번에 왕복하기도 한다.
캠핑장에서 숙박하는 경우 : 엘찬텐 마을에는 장비 대여점이 많고, 캠핑장도 여러 곳이 있어 자연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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