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ace N. Allen(알렌) 선교사
Dr. Horace Newton Allen, April 23, 1858 - Dec. 11, 1932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 선교사처럼 논쟁이 많은 선교사를 과연 찾아볼 수 있을까? 알렌 선교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 학위를 받은 학자들도 여럿이 된다. 그에 대한 논문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조선을 수탈의 도구로 삼은 미제국주의에 충실한 자로부터 조선을 일본으로 부터 지키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은 자, 조선의 참된 벗이라는 칭호까지…

 

필자는 알렌 선교사의 묘지와 그가 살던 집을 자주 찾는다. 그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닌, 조선의 참된 친구였다는 점을 크게 세 가지로 증명할 수 있는 바, 첫째는 그가 가쯔라-테프트 밀약을 격렬하게 비판한 후 Theodore Teddy Roosevelt(디어도어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해임당하고 미국으로 강제송환된 일, 둘째는 미국으로 귀국한 후 Toledo(톨레도)에 정착한 후 구입한 거주지가 아주 고급스럽지가 않다는 점(일부의 비판대로 그가 조선의 금광 채굴권의 이권에 개입하였다면 귀국후 그의 삶은 실제 삶과는 아주 비교가 될 것이다.), 셋째는 그가 귀국 후 바로 개업의로 나선 것이다.(미국정부로부터의 공무원 연금수령이 거부되었다.)


  
알렌 선교사는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근교 델라웨어 시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에이던 알렌(Ethan Allen)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25세에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의과대학에 재학 중 D. L. Moody가 설립한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 운동(Student Voluteer Movementfor Foreign Missions) 연수회에 참가하여 의료 선교사가 되기를 헌신했다.

결혼과 동시에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중국으로 파송받으나 아내의 건강, 그리고 먼저 온 선교사들과의 마찰 등으로 의료 선교사가 필요한 조선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문의하였고, 마침 주 조선 총영사관 주치의를 찾고 있던 미국정부와 장로교 선교부 와의 이해부합으로 1884년 9월 20일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이날이 조선의 최초 공식 기독교 선교사가 입국한 역사적인 날이다.

처음 그의 공식적인 입국 신분은 미국 공관의 주치의였고 후에는 영국, 중국, 심지어 일본 공관의 주치의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조선(대한제국) 최초의 체신기관인 우정국 낙성식때 김옥균을 비롯한 개혁파가 보수파를 제거하려는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이때 보수파의 중추세력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을 맞았다.

그는 동맥이 끊기고 목 뒤쪽 두 군데, 몸 일곱 군데의 자상을 입었다.

14명이나 되는 왕의 어의(한의사)들도 그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

이때 탁지부의 고관 관리로 있던 몰렌도프의 주선과 고종의 간절한 간청으로 미 공관 관리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만약 의사의 시술에도 불구하고 왕족이 목숨을 잃게 되면 그 책임을 의사가 지게되는 조선의 관습을 미 관리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탁월한 의술과 기도, 석달간의 정성어린 치료로 민영익이 기적적으로 회생하게 된다.

민영익과 고종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에게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한국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베푸는 집이라는 의미)을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고종은 알렌을 조선 조정의 참판에 서품하고 궁중 어의로 임명하였다.

알렌의 의료선교는 직접적인 선교는 아니었지만 언더우드 선교사나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놓았다.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과 조선왕실과의 친밀한 관계는 조선 왕조의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천주교와는 달리 선교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수많은 미국, 카나다 선교사들이 영어교사, 혹은 과학교사의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이로 인하여 미 공사 푸트와 알렌과의 관계는 틀어지지만) 130여년의 조선, 한국 기독교 역사에 2,000여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다녀갔다.

이 초기의 40여명의 선교사들을 우리는 제1차 미국 선교사 진(The First Generation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으로 부를 수 있다.

실로 알렌 선교사를 ‘한국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안련(安連)이라 불렸는데 묘하다. 선교사들 입국의 길을 ‘안전하게 연결시켜 주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근래에 알렌 선교사에 관하여 한국 기독교 사학자들 사이에 그에 관한 긍정적 재조명의 시각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1890년 이후에는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공사 대리등을 지내고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반대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강제로 미국에 송환될 때까지, 끝까지 조선(한국)을 위해 근대화 사역과 반일 친한의 강경책을 밀고나가는 데 앞장선다.

알렌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 초창기부터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 조선(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더러는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을 사기도 하고, 더러는 본국 정부와 갈등과 불신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일관된 헌신을 보여줬다.

그리고 1905년 6월 9일 그의 나이 47세 때 조선을 떠나 미국 톨레도시에서 병원을 개업하였고 1932년 1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말년은 참으로 불운했다. 심한 당뇨병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였고 개업의 활동도 수년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오하이오주 톨레도 시 우드랜드 역사묘지(Woodlawn Historical Cemetery)에 잠들어 있다.(왈브릿지 열방교회에서 20여분 거리에 알렌 선교사가 22년 살던 집, 마지막 다녔던 교회, 그리고 묘지가 있다.)

그의 생애 가운데 황금기는 한국에서 보낸 21년이었다.

뿐만 아니라 1884년 한국에서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집전하였고 1885년 6월 21일 주일 헤론 선교사 부부와 스크랜턴 부인의 언니와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예배를 그의 사택에서 드렸는데 이것이 남대문교회의 효시라 볼 수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역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외교 사역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알렌 선교사가 한국인 안내자와 함께 당나귀를 타고 서울 근교로 왕진을 떠나는 모습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의 자필 진료기록  연세의료원 제공
 

 


         알렌(安連) 선교사 연대기           

Apr. 23, 1858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
1881  웨슬리언 동문이던 프란시스와 결혼
Oct. 11, 1883 남경·상하이 선교사로 중국 입국
Jul. 22, 1884 조선 선교사로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로부터 허락
Sep. 20, 1884 알렌 선교사 한국 입국(미합중국 주 조선 공사관 주치의)
Dec. 04, 1884 갑신정변(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살림, 고종의 총애를 받음)
Apr. 10, 1886  고종의 허락으로 광혜원
 (최초의 병원, 나중에 제중원으로 이름 변경)
Agu. 1887  고종으로부터 참찬관에 임명, 선교사 사직
Agu. 1887  제중원에서 가정교회 시작(남대문교회)
Jun. 1889  참찬관 사직, 선교사 복직(부산에서 선교활동)
Jul. 9, 1890  미합중국 주 조선 공사관 서기로 임명(~1894), 선교사 사직
Jul. 27, 1897  맥킨리 대통령에 의해 미 합중국 주 조선 총영사로 임명
 (~1905)
1905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파면 당함
 (가쯔라-태프트 밀약을 공개비난)
 “I Fell With Korea”
1905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시에 정착, 의원 개업
Dec. 11, 1932  파크 애비뉴 톨레도 자택에서 별세,
 우드랜 역사묘지에 매장(7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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