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Gifford (기포드) 선교사 ①
Daniel L. Gifford, Jan. 19. 1861- Apr. 10. 1900 (Entering Korea in 1888)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장 먼저 불태우고 있던 사람은 다니엘 기포드(Daniel L. Gifford)였다. 1861년 1월 19일 일리노이(Illinois) 주 엘진(Elgin)에서 태어난 기포드 선교사는 미시간에 있는 알마(Alma) 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1888년에 졸업했다. 그해 2월 21일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조선(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오타와(Ottawa)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가 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0월 27일이었다. 기포드 선교사만큼 조선(한국) 선교지에서 선교사로서의 성실과 열정을 소유한 사람도 드물 정도였다.

 

기포드 선교사는 기독교 선교 초기에 주로 교육과 복음 선교 분야에서 활동했다. 1861년 일리노이(Illinois) 주에서 태어난 기포드 선교사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McCormic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고, 1888년 10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 처음으로 조선(한국)에 선교사로 온 이가 바로 기포드 선교사다. 기포드 선교사는 사실 최초의 장로교 목사 출신 선교사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보다 더 일찍 선교사로 파송 되었으나 일본에 머무르면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다가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지체하다가 언더우드 선교사가 먼저 입국하므로 최초의 목사 선교사란 명예를 빼앗기고(?) 만다.

 

내한 초기에 기포드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새문안교회에서 그를 도우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선교여행을 하느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을 떠나 있을 때면 기포드 선교사가 그를 대신해 교회를 보살폈다.

 

선교지에 도착한지 2년이 지난 후 1890년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전신)의 2대 학장이던 메리 헤이든(Mary Hayden)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1892년부터 발행된 선교잡지에 많은 기고를 했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으로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신학교 교장으로 목회와 교육분야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기포드 선교사는 1893년부터 새문안교회가 남대문 부근에 마련한 기도처소에서 정기적으로 사경회를 이끌었고, 1894년 겨울부터 이듬해 8월까지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로 헌신했다. 이어 그는 1894년 동대문 부근 연못골에서 전도집회를 열고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세워 그 이듬해 부터 담임목사로 헌신했는데 이 교회가 바로 연동교회다. 이처럼 그는 연동교회 초창기 개척과 성장에 기여한 다섯 명의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기포드 선교사는 평소 조선(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선교잡지 <The Korean Repository>에 조선(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특히 그는 선교를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담담하면서 세밀하게 그려 <조선의 풍속과 선교(Everyday Life in Korea)>라는 책으로 펴냈다.

 

시흥, 김포, 안성 등 경기도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선교에 정열적으로 헌신하던 기포드 선교사는 결국 선교 여행 중 이질에 걸려 1900년 4월 10일 39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기포드 선교사 부부 묘비에는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ich die in the Lord.(기록하라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성경 말씀(요한계시록 14:13)이 쓰여 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아래와 같이 기포드 선교사를 정의한다. “기포드의 선교사 경력은 대단한 성실과 진지한 성품으로 특징 지워졌으며,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은 어떤 일이든지 충성을 다했다. 그는 항상 천성적인 헌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신사적이고 양보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실성과 맡겨진 일에 대한 충실함, 강한 책임감으로 인해 기포드는 그만 건강을 잃고 말았다. 1896년 건강 문제로 불가불 선교지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6개월 동안 선교지에 홀로 남아 사역을 계속하던 아내 역시 그와 합류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898년 선교지로 돌아온 기포드 선교사는 본래의 성실성으로 인해 선교에 헌신하다 경기도 남부 지방 순회 전도 여행중 1900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가 “인간적으로 매우 친근미가 넘치고 사랑이 넘쳤던 친구” “문학적인 탁월한 통찰력을 갖고 뛰어난 글을 썼던 완숙한 학자”라고 극찬했던 기포드는 선교사는 그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39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교육 선교사인 그의 사랑하는 아내 메리 선교사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로부터 1개월후 남편의 뒤를 뒤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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