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 10년, 결혼을 하고도 10년. 근 20년을 돈 벌러 다녔다. 그러나 일한 연수만 길 뿐 떼돈을 번 건 아니었다.
월급이라고 받으면 저축보다 지출이 더 많았다. 빚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흥청망청 쓸 만큼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쥐꼬리 월급이었다. 큰맘 먹고 저축을 시작하지만 끝은 언제나 중도 해지였다.

손에 쥔 것 없이 결혼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단칸방'이라는 곳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친구들도 그 즈음 결혼을 하나둘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부모가 전세금을 대 줘서 그런대로 안정되게 출발했다.
번듯한 집에서 시작하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반면 초라한 단칸방에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내가 한심하고 속상했다.
그나마 남편과 함께여서 마음을 빨리 추스를 수 있었다.

첫애 낳고 옷 가게며 분식집이며 장사를 시작했다. 길바닥에 자리 깔고 노점상도 해 봤다. 모두 손해 보고 문을 닫았다.
월급쟁이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간 직장은 일찍 출근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곳이었다.
일이 바쁘면 밤 12시에 마치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저축을 시작했다.
저축이란 게 혼자서는 표도 안 나던 것이 남편과 함께 넣으니까 눈에 띄게 모였다.
그러다 숨 좀 고르려 멈춰 서 보니 십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단칸방으로 시작했었는데 어느 날 작은 아파트가 우리 것이 되어 있었다.
잘 나가던 그 친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10년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사진첩 속에 추억을 담았다면 우리는 집 한 채 속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십 년 동안 노동한 대가로 얻은 너무도 소중한 집이다.

나처럼 살았던 친구가 있다. 이 친구도 첫애를 시댁에 맡기고 힘들게 일해서 작은 집을 마련했다.
둘째를 낳고는 직장을 그만뒀다.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교회와 가정에만 애정을 쏟는 친구다.
외벌이로 월급은 적었으나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자라게 하는(마 6:26~28)' 신을 친구는 믿었다.
염려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살림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흥분도 잘 하지 않는 이 친구를 남편은 의지하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맡겼다. 박봉이라 미안해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리라.

부족하지만 주신 것에 감사하려 했으나 늘 그런 건 아니었다. 매달 반복되는 마이너스 가계부가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남편 직장이 언제 잘릴지, 언제 월급이 삭감될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남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혼자 버는 부담을 덜어 줬으면 하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 살 터울 두 딸 밑으로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생활비, 관리비, 십일조, 각종 헌금, 아이들 학원비 등등. 저축은커녕 남편 몰래 갖고 있던 비상금마저 써 버린 지 오래다.

그런대로 남편에게 신뢰를 얻으며 가정을 꾸려 나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어떻게든 살아내는 아내가 신통했다.
그러나 한편, 일 할 수 있는 나이에 놀고 있는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이런 남편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더 잘하려 애쓰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안타까운 건 교회에 헌금하는 사실을 남편이 모른다는 거다. 아니 헌금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지출이 만만찮은데 말이다.
그래서 쪼들린다는 하소연을 더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어느 날 지금 맡고 있는 사역을 내려놓고 일을 해야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처음 나온 말은 아니다.
그때마다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기도해 보라는 말 속에 숨은 뜻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책임져 주지도 못할 사람들의 습관적인 조언 앞에서 교회 외에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나는 몹시 안타깝기만 했다.
친구는 전도사님의 말을 기도 응답이라 믿고 직장에 대한 미련을 조용히 접었다. 그랬던 그가 한참이나 지나서 다시 그 말을 꺼낸 거다.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달라고 수차례 부탁했건만 모두 거절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일자리가 생겨도 고민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돈 때문에 사역을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회에 퍼져 있는 분위기가 그렇다. 어느 권사님이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것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정에 힘든 일들이 있었던 걸로 안다. 사역하며 기도하며 그 모든 시기를 이기고 일어설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어린이집 일을 배우면서 사역을 내려놓게 되었다.
아기들을 돌보는 일이 권사님 체력으로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기도를 요청하는 날이 많았다.

권사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지만 그 뒤가 몹시 불편했다. 우선순위가 교회가 아니라 돈이라는 게 그들에게는 믿음 없는 짓으로 보인 거다. '힘들수록 더 교회 나와서 기도해야지, 쯧쯧. 그러니 갈수록 나빠질 수밖에'라는 언제나 일관된 잣대다.
권사님이 그동안 그리 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생계의 위협을 느꼈으면 그 여린 몸으로 아기 돌보는 일을 해야 했을까.
이 권사님 말고 어느 집사님도 사역을 내리고 잠시 잠잠할 때가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돈 따라 교회 일 하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강대상에서는 남편 돈 잘 벌어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며 설교한다.
그래야 여자가 편하게 교회 나올 수 있다고.

친구는 이런 걸 나보다 더 많이 봐왔던 터라 여자는 돈벌이하면 안 되는 걸로 이미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도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함께 이 건을 두고 기도했다. 결심하고 전도사님께 말씀을 드렸다.
역시 돌아오는 답은 한 가지였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를 들이민다.
매번 돌아오는 정해진 답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친구는 혼자 결심을 했다.
기드온처럼 세 가지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사사기 6장).
그 세 가지를 목사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한다. 또다시 직장을 포기하고 주의 일에 전념하기로 결정한 후 돌아온 답이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라고 한다.
본인이 기도했고 본인이 들었고 본인이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다만 기적 같은 일이라며 축하해 줄 뿐이었다.
속상한 건 이 말씀을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교회에 주야장천 나오는 열심당원이라면 세 번 이상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성도가 이러할진대 목사 사모님은 오죽할까. 대형 교회는 사역하기에 바쁜 목사님을 위해 내조에 힘쓰라는 분위기다.
재능이 있는 사모님은 그 재능을 써 보지도 못한다고 한다.
개척 교회는 생계가 절박하다고도 한다. 무엇하나 나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말 하나에 흔들린다.
그 누군가가 정말 신일까.
신이 왜 재능을 못 쓰게 막으며 왜 일을 못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생활이 흔들리는데 기도한다고 밥이 떨어지는가. 간혹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느 이름 모를 성도가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안쓰러워서 몰래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 세 번은 부담스럽다. 도와주는 사람도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지 멀쩡한 인간이라면 본인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못하는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자는 그 기도가 자칫 구걸이 될 수도 있다.

바울은 천막 기술자로 일하며 본인 생계는 본인이 해결했다.
성도들의 섬김을 받으며 설교에만 전념한다 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할 사람 없는데도 말이다.
성도를 배려하고 성도에게 부담 주지 않는 그의 작은 행동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자기들 먹고 살기도 빡빡한데 바울을 섬기느라 하나를 주고 나면 아마 전부를 준 거나 마찬가지로 타격이 컸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마태복음 6장 33절 따라 노동을 내려놓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했고 스스로에게 당당했다. 반면 예수님은 사역만 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식도 없었다. 그러니 가족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었던 것 같다.
혹시 지금의 교회가 이런 예수님만 보고 배운 건 아닐는지.
고고한 선비인 양 뒷짐 지고 하인이 갖다 바쳐 주길 바라는 모양새다.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기도했더니 하지 말라고 하더라가 아니라 할 자신이 없다고.
일꾼이 없는데 저 집사님마저 일하러 가 버리면 이 일을 누구한테 맡길까 걱정된다고.

외벌이 남편은 마누라, 자식들 굶기지 않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터로 나간다. 가정 경제가 위태위태한데 마누라는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을 들고 교회로 나간다.
믿지 않는 남편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 준 아내 덕에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어서 고맙고, 쥐꼬리 월급이지만 여전히 이 집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서 고맙다.
이제 아내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또 고생할 거 생각하면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남편이 모르는 사역을 하나 더 맡게 되었다.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들의 젊은 날 추억을 무참히 짓밟는 일은 없어야 한다.
허나 이것이 교회의 뜻이라면 소중한 집은 점점 규모를 줄여야 할 것이다.
그 줄여진 일부는 남편 모르게 고스란히 교회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