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대면한 부림사건 핵심 피의자 "곧 공산주의사회 오면 우리가 검사님 심판할 것"

1981년 부산지검 공안부 검사실. 고영주 검사가 부산지역 의식화 학습 사건인 ‘부림(釜林) 사건’의 핵심 피의자 이상록씨와 마주앉았다. 경찰에서 사건을 넘겨 받은 후 첫 대면. 자리에 앉자마자 이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검사님은 역사의 발전법칙을 모르십니까?” 고 검사는 당황했다. “무슨 소립니까?” 당시만 해도 유물사관이 많이 퍼져 있지 않을 때였다.

이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발전합니다. 원시공산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사회,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곧 공산주의 사회가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에게 신문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겁니다.”

고 검사가 피의자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도 밀리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 역사가 그렇게 공식적으로 발전하는 거라면 공산주의 사회도 모순이 있을텐데, 공산주의 다음은 어떤 사회가 도래하는 겁니까?” 이씨가 발끈했다. “아직 공산주의 사회가 오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사회를 논하라는 건 언어의 유희 아닙니까. 우리 갖고 장난하지 마세요!”

고 검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들과 말장난 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난 솔직히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살고 싶은 생각이 없고, 만일 할 수 없이 살아야 한다면 당신들 심판을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자유민주 체제이고, 나는 그 체제를 지켜야 하는 공안검사니까 당신들 조사해서 기소할 수밖에 없어요.”

고 검사는 2006년 서울남부지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검사 생활 27년 중 20년을 공안분야에서 일한 베테랑 공안검사였다. 법무법인 케이씨엘 대표변호사인 그는 지금도 32년 전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처음 만나는 검사 앞에서 당당했던 이씨의 태도와 말은 충격이었다”고 했다.

최근 개봉해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변호인’은 고 변호사가 수사했던 부림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세무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변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 속에서, 부림 사건은 용공조작 사건으로 묘사되고, 피의자들은 각종 고문을 당한다.

“부림사건이 용공조작? 말도 안되는 얘기”

부림 사건은 정말 공안당국이 조작한 것일까? 서울 수송동에 있는 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사실 관계부터 물었다. 그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부림 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 맞는다”고 했다. “우리가 조작했다면 부림 사건 핵심 인물이었던 이상록씨가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겠느냐”고 했다. 그는 “나만 전면에 나선 느낌이어서 부담스럽지만 나까지 물러나 있으면 영화가 진실이 돼버릴 것 같아 얘기를 해야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부림 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었다"고 말하는 고영주 변호사. / 이준헌 기자heon@

―영화에서처럼 부림사건은 용공조작 사건인가?
“아니다. 공산 혁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집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공산주의를 학습한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솔직히 나도 당시 군사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가 대안이 될 순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당시 공산주의에 경도된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 앞으로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은 내가 공안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선 계기가 됐다.”

부림 사건은 1981년 부산지역 학생·교사·회사원 등 22명이 ‘반국가단체의 이적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관련자 대부분은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83년 12월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부림 사건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법원은 2009년 부림 사건 일부 관련자들의 계엄법 위반에 대해선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선 유죄 판결을 유지했다. 법원은 지난 3월 유죄 부분에 대한 재심을 개시한 상태다.

―용공조작이 아니라는 근거가 더 있나?
“우리가 용공조작을 했다면 기소 당시 사건을 대대적으로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소만 하고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선 쉬쉬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좌경 의식화 학습을 한다는 얘기를 쉽게 하기 어려웠다. 대학생들이 북한 체제를 동경하고, 김일성을 존경한다면 북한에서 얼마나 좋아했겠나. 당시 검찰에선 큰 일이다 걱정 하면서 속으로 끙끙앓았지만 북한에 이롭게 될 것 같아 제대로 사건을 설명하지 않았다.”

고영주 변호사./ 이준헌 기자heon@
고영주 변호사./ 이준헌 기자heon@

“부림 사건 실상을 알린 계기는 이듬해 터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이후엔 결국 사건 실상이 다 알려지지 않았나?
“계기가 있었다. 1982년 3월에 터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미투쟁사건이었다. 당시 방화 현장 근처 빌딩에서 두가지 종류의 삐라가 살포됐다. 주한미군 철수를 촉구하고, 남한 정부는 북침 준비를 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로는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공안당국으로선 왜 이런 삐라가 살포됐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학생들이 좌경 의식화 학습을 받고 있었다는 걸 밝힌 것이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현장(왼쪽),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사용했던 타자기·프린트기·불온 선전물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현장(왼쪽),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사용했던 타자기·프린트기·불온 선전물들
―당시 반응은 어땠나?
“당시 국민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안검사들이 학생들을 빨갱이로 만들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용공조작이란 얘기가 그 때 나왔다. 오죽했으면 미국에 유학 가 있던 친구가 일부러 내게 편지를 보내 ‘용공조작을 해가면서까지 검사를 해야겠느냐. 그만 사표 내라’고 하더라. 하지만 1986~87년 산업현장에서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이 근로자들을 상대로 의식화 학습을 시키고 노동쟁의 하는 걸 보면서 대학에서 좌경 의식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국민들이 깨닫게 됐다.”

―영화 변호인에선 고문 장면도 나오는데.
“적어도 검찰에서 고문은 절대 없었다. 경찰 수사 단계에선 모르겠다. 다만 피의자들이 경찰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한 기억은 없다. 이상록씨처럼 처음 만난 검사를 협박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경찰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생각했겠나.”

―당시 피의자들은 요즘 공안사범처럼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았나?
“당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는 자신의 신념을 얘기했다. 이른바 운동권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건 1982~83년 법정투쟁지침이 나온 이후다. 수사 단계에선 묵비권을 행사하고, 공산주의 얘기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고영주 변호사.
고영주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나는 부림 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했다”

―당시 부림 사건 변호인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알고 있었나?
“솔직히 몰랐다. 수사에 관심 있었지 변호인이 누구인지 신경 안썼다. 또 변호인들도 많았고. 당시 부산의 쟁쟁한 인권변호사이던 이흥록 변호사 정도는 알았지만, 노 대통령은 잘 몰랐다. 나중에 노 대통령 측에서 이 사건을 부각하면서 알게 됐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의 일화도 언급했다. “내가 대검 감찰부장으로 있을 때였어요. 당시 김승규 법무부장관이 대검 간부들에게 저녁을 사는 자리였는데, 과거사 진상규명 얘기가 나왔어요. 부림 사건을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으로 한다는 얘기가 있을 때였죠. 내가 ‘부림 사건이 민주화 운동인 줄 알고 진상규명을 한다고 하는데, 그 사건은 틀림없이 공산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이걸 진상규명하면 부메랑이 돼 대통령에게 누가 될 겁니다’고 말했어요. 그 얘기가 전달됐는지 모르지만 부림 사건은 결국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서 빠졌는데, 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그 사건을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그런데도 부림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건 어떤 이유라고 봐야 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친노(親盧) 세력이 어려운 입장이니 노무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자기들이 민주화 운동 세력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본다.”

―영화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친노 세력,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하는) 문화 세력 앞에 나 혼자 선 느낌이었다. 지금 그게 공산주의 운동이었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나까지 물러나 있으면 그게 그냥 민주화 운동이 될텐데, 그건 아니다.”

“노무현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친노 세력 앞에 혼자 선 느낌”
“부담되지만 나까지 물러나 있으면 안 된다 생각”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검찰을 떠났는데, 부림 사건 수사로 피해를 봤나.
“김대중 정부 때 기존 공안검사들이 ‘구(舊)공안’이라고 해서 배척됐다. 제거 대상 10명이 있었는데, 나도 포함됐다. 대부분 검찰을 떠나는 바람에 노무현 정부 때는 내가 유일한 비토(veto) 대상이었다. 노무현 청와대에 부림 사건 인맥이 대거 포진하면서 내게 보복한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억울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왼쪽), 이호철 전 청와대 비서관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왼쪽), 이호철 전 청와대 비서관
당시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은 부림 사건 관련자들이 청구한 재심 사건 변호인이었고, 이호철 민정비서관은 부림 사건 피의자였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고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 때 동기들보다 1년 늦게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노무현 정부의 검찰 첫 인사에서 동기와 후배들이 대거 약진할 때 초임 검사장 자리인 대구고검 차장으로 갔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 내게 대검 공안부장 맡기려 했으나 노무현 청와대서 거부”

그는 노무현 정부 초기 인사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내게 전화를 했어요. 좀 보자고 해서 서울지검 앞 한정식 집에서 만났는데, 대검 공안부장을 맡아달라는 거예요. ‘첫 검찰 인사는 청와대와 당에서 시키는대로 했지만, 이젠 적재적소에 사람을 보내는 인사를 하고 싶다’면서. 근데 ‘노무현 정부에서 공안부장 맡은들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내가 사양했어요. 며칠 뒤 강 장관이 다시 전화를 했어요. ‘청와대 들어가는 길인데 아무래도 대검 공안부장을 맡아줘야겠다’고 합디다. 근데 그날 저녁 다시 전화를 걸어 ‘검사장님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라구요. 당시 문재인 수석이 나를 비토한 거죠.”
그는 “결과적으로 부림 사건이 내 인사에 영향을 미쳤다”며 “당시 공산주의 사회가 안됐는데, 왜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강한 불만이 있었다”고 했다.

검찰을 떠난 뒤 그는 민주노동당(통진당의 전신)이 원내에 진출한 2004년 이후 올 4·11 총선 때까지 3차례에 걸쳐 통진당 해산 청원서를 냈다. 그가 청원서를 직접 썼다.
―왜 그일을 직접 했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어서 직접 썼다. 통진당은 사사건건 북한 편들고, 북한이 지령 내리면 똑같이 성명을 낸다. 강령도 북한의 대남적화혁명전략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도 처벌받기는커녕 정당이란 이유로 엄청난 국고지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당이란 외피를 벗겨야겠다고 생각해 청원서를 낸 것이다.”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그런 일 하는게 부담되지 않나.
“굉장히 부담된다. 변호인도 나만 전면에 나서 있다. 손해도 많다. 기업들이 내게 고문을 맡기려다가도 못 맡기는 경우가 많다. 또 우리 법무법인에서 일반 형사사건은 안 하는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최근의 상황을 유신(維新) 회귀, 공안 통치라고 하는 지적도 있다.
“이제 겨우 정상화되는 것이다. 무슨 유신 회귀이고, 무슨 공안 통치인가. 이명박 정부 때는 시끄러울까봐 이런 일을 못했다. 공안이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공안이 조용하면 나라가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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